현재 ‘신승반점’이 맥을 이어가고 있는 공화춘은 중국 산동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화교 우희광(于希光 : 1886~1949)이 1907년경 ‘산동회관’을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공화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처음 문을 연 ‘산동회관’은 청국에서 이주한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객잔(客棧)’ 성격의 업소였다. 짜장면을 처음 판매한 산동회관은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청조(淸朝)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을 표방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조국에 “공화국의 봄이 왔다(共和國旳春天到了)”라는 뜻을 담아 1912년경 업소의 명칭이 ‘공화춘(共和春)’으로 바뀌었다.
공화춘이 현재의 장소인 선린동 38번지로 옮겨 온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1917년 현재의 장소인 선린동 38-1번지 건물을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명의 화교가 공동으로 매입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4년 7월 인천지역 화교 상인 명부에 중화요리점으로 등재된 점으로 미루어 공화춘은 빠르면 1917년경에서 1934년경 사이에 현재의 장소에서 중화요리점 영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고급 중화요리점으로 경인 지방에서 명성이 높았던 공화춘은 한국전쟁 중 영업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으나, 휴전 후 우홍장이 공화춘의 주식을 인수하고 1968년경 인접 건물을 매입하여 대형 연회장을 갖추면서 1970년대까지 경인 지방 5대 중화요리점의 하나로 그 명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중화요리업에 진출하고 차이나타운 일대의 인천 구도심 상권이 쇠락하면서 경영이 어려워져 1983년 문을 닫고 말았다.
공화춘의 설립자 우희광은 1886년 중국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 유방촌(油坊村)에서 태어났다. 우희광의 출생 전후 시기 중국은 서구 열강의 침략과 정치적 혼란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중국인들이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찾아 해외로 이주하였다. 1907년경 22세의 청년 우희광도 다른 동향의 중국인들을 따라 산동에서 가까운 조선의 개항장 인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우희광은 1907년 인천항 부근에 ‘산동회관’이라는 객잔을 열고 중국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고, 1912년경에는 상호를 공화춘(共和春)으로 변경하였다. 1917년경에는 현재 짜장면 박물관 자리의 건물을 매입하여 중화요리업을 시작해 공화춘을 유명 중화 요리점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교령(橋領)에 선출되어 인천 화교 사회를 위해 헌신하기도 하였다. 슬하에는 1남 5녀를 두었다.
우희광의 장남 우홍장은 1917년 인천에서 태어나 산동성 연대(煙臺)의 익문상전(益文商傳)을 졸업하고 돌아와 가업을 이었다. 부친이 작고한 후 공동 출자로 운영되던 공화춘의 주식을 모두 매입하는 한편, 시설을 확충하여 공화춘을 최고의 중화요리점 가운데 하나로 발전시켰다. 또한 10여 년간 인천화교협회장을 역임하면서 인천 화교 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고, 한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우호 관계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여 한국정부와 인천시로부터 감사장과 명예 시민증을 받기도 하였다. 우홍장은 공화춘 폐업 후 대만에서 생활하다 1993년 세상을 떠났는데, 부인 유숙란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우홍장의 장남 우심진은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을 도와 공화춘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마지막까지 공화춘의 주방을 지켰다. 공화춘 폐업 후 1985년부터는 인천 중앙동에 중화루(中和樓)를 열어 가업을 계승하였다. 2003년 인천에서 작고하였으며, 부인 해덕원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